구례 천은사 / 한국관광콘텐츠랩-김지호 |
전남 구례군 광의면에는 지리산 노고단으로 오르는 길목에 저수지를 두른 산책로가 놓여 있다. 물 건너로 지리산 봉우리가 겹겹이 서고 그 모습이 수면에 그대로 비쳐서, 한 바퀴를 도는 동안 같은 산을 두 번 보게 되는 자리다.
이 길에 상생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는 사연이 있다. 천은사가 1987년부터 관람료를 받아 왔는데 매표소가 절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도로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절에 들르지 않고 노고단이나 성삼재로 가는 사람도 1인당 1600원을 내야 했다. 이 문제로 소송이 여러 차례 오갔고 갈등은 30년 넘게 이어졌다.
길 이름에 담긴 2019년의 합의
구례 천은사 / 한국관광콘텐츠랩-김지호 |
매듭이 풀린 것은 2019년 4월 29일이다. 이날 오전 11시를 기해 징수가 멈추면서 32년 만에 통행료가 사라졌고, 환경부와 문화재청, 전라남도, 구례군, 천은사, 화엄사, 국립공원공단, 한국농어촌공사 여덟 곳이 함께 협약을 맺었다.
전라남도가 도로 부지를 사들이고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이 그 대신 탐방로를 새로 놓기로 한 것이 합의의 뼈대였다.
구례 천은사 / 한국관광콘텐츠랩-김지호 |
그 합의에 따라 새로 놓인 길이 바로 이 산책로다. 폐지 1주년에 맞춰 2020년 6월 2.9킬로미터가 먼저 열렸고 그해 12월 저수지 제방 구간이 이어지면서 3.3킬로미터짜리 순환 코스로 완성됐다.
길을 이루는 세 코스의 이름에도 같은 뜻을 담았다. 소나무 숲을 지나는 나눔길과 저수지를 따라가는 보듬길, 계단 없이 놓인 누림길 셋이 하나로 이어져 서로 살자는 합의를 길 이름으로 남겼다.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 3.3킬로미터
구례 천은사 / 한국관광콘텐츠랩-김지호 |
한 바퀴를 도는 데는 한 시간 반쯤 걸린다. 출발한 자리로 되돌아오는 순환 구조이고 길 위에 전망대가 일곱 곳 놓여 있어, 걷다가 멈춰 물 건너 산을 보는 시간까지 넉넉히 잡아야 한다.
발밑에 밟히는 바닥은 구간마다 다르게 깔려 있다. 저수지 쪽은 나무 데크가 이어지고 숲으로 들어가면 솔잎 깔린 흙길로 바뀌는데, 그 가운데 0.7킬로미터는 계단과 턱을 없애 휠체어나 유모차로도 지날 수 있게 만들었다.
물가에서는 눈여겨볼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저수지에는 수달과 원앙이 깃들어 살고 이른 아침에는 수면 위로 물안개가 올라오므로,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샘이 숨었다는 이름과 물을 담은 글씨
구례 천은사 / 한국관광콘텐츠랩-김지호 |
이 절이 세워진 것은 통일신라 828년으로 전한다. 처음 이름은 단물이 솟는 샘이 있다 하여 감로사였는데, 숙종 때 샘가의 구렁이를 죽인 뒤로 물이 말라 버리자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로 이름을 바꿨다. 875년에 도선이 세웠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이름을 바꾼 뒤로는 불이 자주 났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조선의 이름난 명필 이광사를 찾아가 편액에 물을 듬뿍 담아 달라고 청했고, 물이 흐르는 듯한 글씨로 절 이름을 받아 일주문에 건 뒤로는 불이 그쳤다. 새벽에 편액에 귀를 대면 물소리가 들린다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구례 천은사 / 한국관광콘텐츠랩-김지호 |
경내에서는 두 곳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1774년에 다시 세운 극락보전이 2019년 보물로 지정됐고,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수홍루가 이 절에서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