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적으로 자국 영화가 할리우드와 경쟁해 과반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는 나라는 한국을 포함해 단 세 곳뿐입니다.
- 이토록 강력한 한국 영화사의 뿌리에는 1926년 24세의 나이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독립군 출신 천재 예술가 나운규가 있습니다.
- 가혹한 일제 검열을 영리한 알레고리로 뚫고 흥행에 성공한 이 영화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전국에 퍼뜨린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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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동네 극장에서 편하게 한국 영화를 보고 때로는 재미없다고 욕도 하지만, 전 세계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영화는 굉장히 유의미하고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전 세계 200여 개 국가 중에서 자국의 자체적인 영화를 제작하고 소비하는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세계 영화사의 위대한 족적을 남긴 브라질조차 연간 제작 편수가 0편에서 1편을 오가고, 유럽의 대부분 국가도 자국 시장 하나만 보고는 도저히 영화를 찍을 수가 없어 여러 나라가 연합해 간신히 영화를 만듭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식대로 간다는 인도를 제외하면, 세계 영화 영토는 사실상 할리우드로 통일된 제국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다이내믹한 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연간 60편이 넘는 국내 영화를 개봉하고, 자국 영화 시장에서 할리우드 영화와 대비해 점유율 50%를 넘는 전 세계 딱 세 나라(미국, 인도, 한국) 중 하나입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생이 한국 영화(당시에는 '방화'라 불렸죠)를 보러 간다고 하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25년간 손가락질받던 하수구 문화 취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 나라는 하루아침에 할리우드 독점 질서에 저항하는 강력한 문화적 자립 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요?
단 한 명의 영웅, 춘사 나운규의 등장
이 파란만장한 한국 영화사에서 단 한 명의 영웅을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코 35세의 나이에 요절한 춘사 나운규를 꼽고 싶습니다. 그는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라 부를 만한 전방위 영화인이었습니다. 키도 작고 살집도 있는, 흔히 말하는 주연급 미남 배우의 마스크는 아니었지만 그의 인생과 재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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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10:55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나운규는 본래 영화인이라기보다는 독립군이었습니다. 17세 때 3.1 운동을 주도하다 수배되어 만주로 도망쳤고, 홍범도 장군 산하에서 무장 투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왔다가 형사에게 붙잡혀 1년 6개월의 옥살이를 하고 나온 것이 21살 때의 일입니다. 사실 그는 1926년, 그의 나이 24살에 각본, 감독, 주연을 맡은 전설적인 영화 '아리랑'을 찍기 불과 3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통해 자신이 하고자 했던 독립운동의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고 미친 듯이 영화판의 밑바닥을 구르며 몸으로 모든 것을 익혔습니다.
미치광이 알레고리로 일제 검열을 뚫다
당시는 일본의 억압이 극에 달하던 식민지 시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운규가 '아리랑'이라는 민족주의적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구사한 고도의 상징과 알레고리 덕분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영진(나운규 분)은 철학과를 다니던 엘리트였으나, 고문을 받은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이유로 미쳐버린 상태로 고향에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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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25:39
이 '미친 상태'라는 설정이 핵심입니다. 영진이 아무 이유 없이 일본의 앞잡이들을 때려도, 검열관들은 이를 '미치광이의 헛소동'으로 치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악덕 지주의 마름이 영진의 여동생 영희를 겁탈하려 할 때, 미친 영진의 시선에서는 이 상황이 '물을 든 아라비아 상인에게 목이 말라 애원하는 사막'으로 치환되어 묘사됩니다. 결국 동생을 구하기 위해 마름을 찔러 죽인 직후, 영진은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권력자에게 치명타를 가한 순간에야 비로소 제정신을 찾는다는 이 기막힌 설정은 당시 일제 치하 조선 민중의 심정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흥행이 만들어낸 전국구 민족의 노래, 아리랑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1차 상영에서만 제작비의 10배가 넘는 돈을 회수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이 영화의 주제가이자 제목인 '아리랑'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 국가대표급 민요 '아리랑'의 원형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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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41:12
이 노래는 예전부터 내려오던 전통 민요가 그대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나운규가 고향 회령에서 벌목 노동자들이 부르던 여러 소리를 듣고 자란 기억을 바탕으로 직접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다듬어 만든 창작곡에 가깝습니다. 영화가 전국적으로 대흥행을 하면서,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던 이동 영사단이 상영 전부터 마케팅 차원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결국 영화의 거대한 흥행 성공이 특정 지역의 향토요를 넘어선 '전국 단위의 아리랑'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민요도, 대중음악도 아니면서 근대의 지평 첫머리에서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지향성을 띤 노래를 우리는 영화를 통해 만나게 된 셈입니다.
억압의 시대와 요절, 그리고 남겨진 유산
나운규는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일본인을 바지사장 제작자로 내세우고 대본 작가 이름까지 일본인으로 위장하는 등 온갖 전략적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전단지에 검열에서 삭제된 아리랑 5절 가사("문전의 옥토는 다 어디 두고 쪽박의 신세가 웬일이냐")를 몰래 끼워 넣었다가 영화 상영이 금지될 뻔한 아찔한 일화도 그의 꺾이지 않는 저항 정신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1930년대로 넘어가며 일본이 본격적인 제국주의 체제로 돌아서고 기만적인 문화 통치마저 포기하자, 손톱만큼의 진보적인 요소도 모두 검열의 가위질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나운규의 후속작들은 흥행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눈을 감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중 원본 필름이 남아있는 것은 단 한 편도 없습니다.
비록 필름은 사라졌지만, 가장 척박한 시대에 가장 창의적인 방식으로 억압에 맞서고 대중의 마음을 훔쳤던 그의 전략적이고 천재적인 DNA는 분명 오늘날 할리우드에 맞서 50%의 점유율을 지켜내는 한국 영화의 핏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FAQ
전 세계에서 자국 영화 점유율이 50%를 넘는 나라는 어디인가요?
인도, 미국(할리우드), 그리고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단 세 나라뿐입니다.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 시장만으로는 영화 산업을 유지하기 어려워 할리우드 영화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원본 필름은 현재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안타깝게도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나운규의 원본 필름은 단 한 편도 없습니다. 한 일본인 수집가가 '아리랑' 필름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대중에게 공개되거나 반환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민요 '아리랑'이 영화 주제가였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장 널리 부르는 '아리랑'은 나운규가 고향 회령의 벌목 노동자들이 부르던 노래들을 바탕으로 직접 가사를 써서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만든 것입니다. 영화의 폭발적인 흥행과 함께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