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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 대중문화의 시작은 단순한 오락의 등장이 아니라 기차와 시계가 가져온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이라는 근본적인 변화였습니다.
  • 철도의 도입은 정시 출발이라는 근대적 시간 관념을 강제했고, 신분 대신 자본이 우선하는 익명성의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 활동사진의 상륙과 함께 영화관의 지배자인 '변사'가 당대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며 새로운 문화 소비 계층을 탄생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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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똑같은 서사 구조를 가진 이야기를 즐기는데 집에서 혼자 '방각본 춘향전'을 읽는 것과 극장에 가서 '영화 춘향전'을 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핵심은 바로 '시간'입니다. 소설은 내가 시간이 날 때, 내가 편한 속도로 아무 때나 읽으면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정해진 시간에, 같은 공간에 모인 사람들과 '공유된 시간의 약속'을 지켜야만 볼 수 있죠. 1920년대를 전후해 한반도에 대중음악과 영화라는 '흥행의 시대'가 개막한 것은 단순한 오락거리의 등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근대적 시스템이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재구성한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과연 이 시기, 한반도에는 어떤 스펙터클한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요?


도시화와 철도: 공간과 계급을 허물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경상북도와 전라남도였습니다. 서울(한성)을 끼고 있는 경기도조차 3위에 불과했죠. 전통적인 농경 사회였기에 메가시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일본인이 많이 사는 곳을 우선적으로 개발하는 '부(府)' 체제를 도입하면서 부산, 대전 등 새로운 도시들이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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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06:07


이동 수단도 급변했습니다. 가마꾼이 사라진 자리를 수만 대의 인력거가 채웠고, 1920년대 후반이 되면 포드와 시보레 자동차가 치열한 마케팅 전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근대화의 가장 결정적인 상징은 단연 철도와 전차였습니다. 1899년 개통된 전차는 서울 시내를 거미줄처럼 이었습니다. 당시 여름밤이면 차가운 철로를 베개 삼아 자다가 아침 첫 전차에 목숨을 잃는 끔찍하면서도 웃지 못할 촌극이 빈번하게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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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11:55


무엇보다 기차는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적 시간의 질서'를 강제했습니다. 기차는 승객이 시간을 알건 모르건 정시에 매정하게 출발해 버립니다. 게다가 기차표에는 내 신분 정보가 없습니다. 돈을 내고 1등 칸을 타느냐, 3등 칸을 타느냐 하는 자본의 논리만 있을 뿐, "내가 누군 줄 아느냐"는 양반의 호통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철저한 익명성의 공간이 탄생한 것입니다.


설렁탕 한 그릇 값의 스펙터클, 영화의 상륙


이러한 시공간의 변화 속에서 활동사진, 즉 영화가 들어옵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영화 도입 속도는 세계적인 트렌드와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처음 영화가 상영된 지 불과 2년 뒤에 조선에 들어왔고, 유성영화(토키) 역시 일본보다 4년밖에 늦지 않게 상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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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19:31


초창기 영화 마케팅은 꽤나 기발했습니다. 영국 담배 회사가 충무로에서 빈 담뱃갑을 가져오면 활동사진을 보여주는 식으로 판촉을 시작했죠. 이후 1903년 첫 유료 상영이 열렸을 때 입장료는 10전이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당시 설렁탕 한 그릇 값이 딱 10전이었습니다. 지금도 영화 한 편 가격이 든든한 국밥 한 그릇 가격과 엇비슷한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대중문화의 기준 물가는 참 묘하게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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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22:10


스크린 밖의 지배자, '변사'의 시대


그렇다면 초기 무성영화 시대의 진정한 극장 스타는 누구였을까요? 스크린 속 배우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화면 옆에서 대사와 지문을 읊어주던 변사였습니다. 당시 여배우는 천한 직업으로 여겨져 남자가 여자 목소리를 내며 연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중에 마호연, 이월화, 복혜숙 같은 직업 여배우가 등장하긴 했지만, 극장의 절대 권력은 여전히 변사에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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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26:18


어느 정도로 대접을 받았냐면, 영화 주연 배우가 두세 달 고생해서 영화를 찍고 50원을 받을 때, 단성사나 조선극장의 톱 변사는 한 달 월급으로 무려 150원을 받았습니다. 주인공이 거리를 지나가면 분장 탓에 아무도 못 알아보지만, 변사가 극장 문을 나서면 장안의 유명 기생들이 인력거를 쫙 대기시켜 놓고 서로 모셔가려 경쟁할 정도였습니다.


변사는 단순히 대본을 읽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화면의 진행 속도와 대사를 완벽하게 맞추는 싱크로율은 기본이고, 그날 객석에 앉은 관객이 양아치인지 나이 든 어르신인지 단번에 파악해 맞춤형 애드리브를 던지는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최초의 자본주의적 스타였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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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철공소닷컴 제공 영상 · 30:46


무성에서 유성으로, 새로운 무대를 향해


이처럼 1920년대는 철도라는 하드웨어와 영화라는 소프트웨어가 결합하여 대중의 시공간 감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흥행의 개막기였습니다. 자본이 신분을 대체하고, 정해진 시간에 다 같이 극장에 앉아 변사의 입담에 울고 웃는 새로운 문화 소비 계층이 탄생한 것이죠.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변사의 전성기도 영원하게 두지 않았습니다. 화면 자체에서 소리가 나는 유성영화가 상륙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성영화 시대의 끝자락, 그리고 유성영화의 태동기 앞에서 한국 영화계는 '나운규'라는 전설적인 인물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FAQ

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지역은 어디인가요?

서울이나 경기도가 아닌 경상북도와 전라남도의 인구가 가장 많았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철저히 농업 중심이었기 때문에 메가시티 개념이 없었으며, 이후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일본인 거주를 중심으로 부산, 대전 등에 근대적 도시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기차의 도입이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기차는 신분 제도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적 익명성을 가져왔습니다. 양반이라는 신분보다 1등 칸 표를 살 수 있는 자본이 중요해졌고, 승객의 사정과 무관하게 정시 출발하는 규칙을 통해 대중이 근대적인 시간 관념을 강제로 따르게 만들었습니다.

초창기 영화표 가격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나요?

1903년 첫 유료 영화 상영 당시 입장료는 10전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설렁탕 한 그릇 값과 동일한 수준으로, 현대의 영화 티켓 가격이 국밥 한 그릇 가격과 비슷한 것과 묘한 평행이론을 보여줍니다.

무성영화 시대에 주연 배우보다 변사가 더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성영화는 소리가 없었기 때문에 변사가 화면 옆에서 모든 대사와 해설을 생동감 있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관객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읽고 분위기에 맞춰 애드리브를 던지는 변사의 역량에 따라 영화의 재미가 좌우되었기에, 톱 변사는 주연 배우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익을 올리며 당대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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