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1

적 막으려고 쌓은 성벽에 조선이 일부러 구멍 다섯 개를 뚫은 이유

spark_icon6분 지식
  • 한양도성은 분지 지형에서 발생하는 내부 물을 원활히 배출하기 위해 성벽 밑동에 수문을 내는 역발상 설계를 도입했습니다.
  • 쇠창살 문으로 침입을 막고 수위를 조절했으나 토사 퇴적이 겹치자, 영조는 상류 식생 조성과 대규모 준천으로 문제를 근원부터 풀었습니다.
  • 자연의 힘을 무작정 막지 않고 길을 터주며 발생 원점을 다스린 조선의 토목 공학은 오늘날 인프라 관리에도 분명한 통찰을 남깁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둘러싼 18.6km 길이의 한양도성 밑동에는 사람이 드나들 만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바로 오간수문입니다. 성벽에 구멍을 낸다는 것은 방어 시설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하지만, 이는 치명적인 결함이 아니라 철저한 토목공학적 계산에 따른 설계였습니다.

자연의 거대한 힘을 무력으로 억누르지 않고 통제 가능한 방식으로 거르는 역발상의 원리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도성 방어와 내부 배수의 상충: 왜 구멍을 뚫어야 했는가

한양은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대접 모양의 분지 지형입니다. 비가 내리면 사방의 산에서 쏟아진 물이 도심 한복판으로 모여 청계천을 이루고,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빠져나가야만 하는 구조였습니다. 한양도성에 물이 들어오는 문은 없고 오직 물이 나가는 문만 존재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태조 때 처음 성벽을 축조할 당시에는 물길까지 완벽히 차단하려 했으나, 장마철 폭풍우가 몰아치자 축대가 무너져 내리며 도성 전체가 침수되는 위기를 겪었습니다. 물길을 억지로 막으면 성벽 자체가 붕괴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조선 조정은 성벽 밑동을 터서 물길을 내주는 선택을 내렸습니다. 북쪽 수문은 처음 세 칸에서 1421년 다섯 칸으로 확장 논의되어 오간수문이 되었고, 남쪽에는 두 칸짜리 이간수문이 마련되었습니다.

3D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구현된 4개의 아치형 수문이 있는 석교의 모습이며, 화면 하단에 자막이 표시되어 있다.

성내의 물을 효율적으로 배출하기 위해 수문의 개수를 늘리며 수차례 설계를 보완해 나갔습니다.

사람과 물을 동시에 통제하는 수문의 개폐 메커니즘

수문을 넓히자 성벽에 적이 침투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기는 딜레마가 발생했습니다. 구멍을 무한정 키우면 하부 지지력이 약해져 홍수 시 성벽 전체가 무너질 위험도 따랐습니다. 이에 조선 조정은 물은 통과시키고 침입자는 거르는 철전문(쇠창살 문)을 고안했습니다.

돌로 쌓은 아치형 수문 다섯 칸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으며, 한쪽 수문에는 쇠창살 형태의 철문이 설치된 3D 그래픽 모델.

수문의 구조적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한 쇠창살은 물의 흐름은 방해하지 않으면서 외부인의 침입은 막아주는 똑똑한 해결책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쇠창살을 내려 사람의 출입을 원천 차단하고, 폭우가 쏟아져 부유물이 창살을 막을 위험이 생기면 쇠줄을 당겨 문 전체를 들어 올렸습니다. 1421년 태종이 내린 명처럼 평소에는 닫아 방어를 완성하고 홍수기에는 열어 수로를 확보하는 유연한 이중 제어 체계를 구축한 셈입니다.

수문 폐색의 본질적 원인: 물이 아니라 흙과의 싸움

수위 조절 장치를 갖춘 뒤에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수문 앞에 유속이 느려지는 구간이 형성되면서 상류에서 밀려온 흙과 모래가 급격히 가라앉기 시작한 탓입니다. 쇠창살에 걸린 나뭇가지에 흙이 엉겨 붙으면서 창살 자체가 토사를 가두는 거대한 댐처럼 변했습니다.

더욱이 17세기 이후 도성 인구가 급증하고 땔감 채취로 인근 산들이 민둥산으로 변하자, 비가 올 때마다 막대한 양의 토사가 개천으로 쏟아졌습니다. 영조 즉위 무렵인 1725년에는 개천 바닥이 평지 높이까지 차오르며 동대문 일대 배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수문 앞에서 흙을 단순히 퍼내는 방식으로는 다음 장마 때 같은 문제가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영조 준천과 식생 조성을 통한 원점 통제

영조는 흙을 하류 수문에서 막는 대신 흙이 발생하는 근원지를 통제하는 근본적인 역발상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1759년 준천사를 신설하고, 1760년 광화문 부근 송기교부터 동대문 밖 영도교까지 8개 구간에 연인원 20만 명을 투입해 하천 바닥을 대대적으로 굴착했습니다.

개천 양옆으로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땅 아래로 드러난 나무뿌리가 흙을 꽉 잡고 있는 모습이 묘사된 3D 그래픽 영상

버드나무 뿌리로 흙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방지해 수문의 부담을 근본적으로 줄였습니다.

동시에 수문 주변과 제방을 따라 버드나무를 대대적으로 식재했습니다. 나무뿌리가 토양을 단단히 붙잡아 흙이 하천으로 쓸려 내려가는 출발점 자체를 묶어둔 것입니다. 1773년에는 개천 양안을 석축으로 정비하고 물길을 직선화하여 유속을 확보함으로써 토사 퇴적을 억제했습니다. 이 일련의 치수 기록을 담은 『준천사실』은 후대 도시 방재의 핵심 지침이 되었습니다.

현대 도시 인프라 해석에 주는 시사점

일제강점기인 1907년 수문이 철거되고 콘크리트 복개 도로 아래로 사라졌던 오간수문 기초와 이간수문은 2000년대 청계천 복원과 동대문운동장 철거 과정에서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발굴되었습니다. 수로 중앙에서 유속을 가르는 유선형 뱃머리 구조(분수합류석)와 석축 날개벽은 자연의 흐름을 부드럽게 유도하는 조선 토목의 정교함을 실증합니다.

오간수문과 영조의 준천 사업이 남긴 통찰은 명확합니다. 자연재해나 물리적 부하를 다룰 때 구조물의 강도만 높여 강압적으로 억누르는 방식은 장기적인 파단을 초래합니다. 시스템의 방어 한계를 명확히 설정하고 흐름을 분산하며 발생 원점의 메커니즘을 제어하는 접근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인프라 관리의 핵심 기준입니다.


FAQ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은 각각 어디에 위치했나요?

오간수문은 한양도성 동쪽 청계천 본류가 빠져나가는 동대문(흥인지문) 남쪽에 위치했고,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처리하기 위해 그보다 남쪽인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일대에 설치되었습니다.

수문에 설치된 쇠창살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쇠창살에 나뭇가지와 부유물이 걸리고, 유속이 느려진 틈을 타 상류에서 내려온 토사가 엉겨 붙으면서 물길을 막는 거대한 퇴적층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준천 사업에서 흙 퇴적을 막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단순히 하천 바닥을 파내는 데 그치지 않고 제방을 석축으로 직선화해 유속을 확보했으며, 수문 주변과 둑에 버드나무를 집중 식재해 뿌리가 흙을 잡아 상류 토사 유실을 원천 차단하도록 했습니다.


0
0